세이와 정책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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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자유민주당 내 파벌로, 1979년 후쿠다 다케오에 의해 창설되었다. 아베 신타로, 미쓰즈카 히로시,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여러 총리대신을 배출하며 자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3년 12월, 비자금 조성 의혹이 불거지면서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 타격을 입었고, 2024년 1월 파벌 해산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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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는 1993년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두 차례 일본 총리를 역임하며 아베노믹스를 추진하고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2022년 유세 중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 아베 신타로 - 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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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정책연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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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세이와 정책연구회 |
로마자 표기 | Seiwa Seisaku Kenkyūkai |
한자 표기 | 清和政策研究会 |
약칭 | 세이와켄 세이와카이 아베파 |
이전 명칭 | 당풍쇄신간담회 기미정회 팔일회 청화회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 |
설립일 | 1979년 1월 24일 |
해산일 | 2024년 2월 1일 |
창립자 | 후쿠다 다케오 |
유형 | 자유민주당 파벌 |
본부 | 도쿄도 지요다구 시오자키 빌딩 3층 |
관련 조직 | 아이세이카이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파) 교유클럽 (가와시마 쇼지로 파) 세이신카이 (가토 로쿠스케 그룹) 보수단결회 |
웹사이트 | 세이와 정책연구회 웹사이트 (보관됨) |
예산 | 3억 2871만 2111엔 (2010년) |
정치 성향 | |
정치적 위치 | 우익에서 극우 |
이념 | 일본 내셔널리즘 국가 보수주의 |
의회 현황 | |
참의원 | (정보 없음) |
중의원 | (정보 없음) |
역대 지도자 | |
현재 지도자 | 집단 지도 체제 (공석) |
2. 역사
세이와 정책연구회(약칭 세이와켄)는 자유민주당의 파벌이다. 굉지회, 헤이세이 연구회와 함께 자민당을 대표하는 명문 파벌로 꼽힌다. 굉지회와 헤이세이 연구회가 자유당 요시다 시게루 파벌을 잇는 보수본류라면,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일본민주당 하토야마 이치로와 기시 노부스케 파벌을 잇는 보수방류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친미적 태도를 보이지만, 자주헌법론에 기초한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재군비에 적극적이다. 대한민국, 중화민국과 인맥을 가진 정치인이 많다. 그러나 창립자인 후쿠다 다케오가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에 앞장섰고, 아들 후쿠다 야스오도 중국과 전략적 상호관계를 추구하는 등 반중적 태도만 보인 것은 아니다.
다나카 가쿠에이와 정치적 경쟁 관계였던 후쿠다 다케오가 사실상 배후에서 자민당을 지배하면서, 1970~80년대에는 비주류로 머물렀다. 아베 신타로가 회장이 된 후에는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가 분열하고 미쓰즈카 히로시, 모리 요시로 등 실력자가 등장하며 주류파로 도약했지만, 아베 사망 후 내분을 겪었다.
후쿠다 다케오는 대장성 관료 출신이었지만, 다나카파와 다케시타파가 족의원을 앞세워 여러 업계와 관계를 맺었기에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재계 주류와 친분이 깊지 못했다. 모리는 헤이세이 연구회의 지원을 받아 총리가 되었기에, 세이와 정책연구회가 정권의 실질적 중추로 올라선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때부터다. 하지만 이때도 니카이 도시히로가 자민당과 업계의 창구 역할을 수행하여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영향력은 문교와 운수 정도에 그쳤다. 또한 파벌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초선 의원들을 다수 영입했는데, 이들은 자금력이 약해 통일교와의 관계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는 의혹이 있다.[171]
2022년 7월 아베 신조 피살 사건 이후 세이와 정책연구회와 통일교의 관계가 자주 거론되기 시작했다.[172] 그리고 실제로 복수의 정치가가 통일교와의 접점이 있음이 드러났다.[173]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탄생한 후, 1962년 이케다 하야토의 소득배증계획에 반대하는 후쿠다 다케오를 중심으로 십일회(기시 노부스케 파벌)에서 분열하여 당풍쇄신연맹을 결성했다.[174][175] 같은 해 10월 30일, 기시는 십일회 해산을 선언했다.[176] 1964년 이케다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직을 사임하고 당풍쇄신 운동도 끝났을 때, 후쿠다를 따르는 의원은 24명뿐이었다. 후쿠다는 이들을 규합해 십일회 사무소가 있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구관을 활동 거점으로 하여 사실상의 후쿠다파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177]
1972년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가 승리하면서, 다나카와 후쿠다 사이에 각복전쟁이라 불리는 파벌 투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후쿠다는 파벌 해소를 주장해 왔고 스스로도 파벌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아, 두 사람의 정쟁은 대체로 다나카가 우위에 있었다. 1976년 오히라 마사요시와 손을 잡고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2년 뒤 다나카와 손을 잡은 오히라에게 총리대신직이 넘어갔다.
1972년 총재 선거 이후 호리 시게루가 이끌던 주산 클럽, 소노다 스나오가 이끌던 춘추회를 규합하여 파벌의 이름을 팔일회로 고쳤다. 이후 후쿠다가 총리대신이 된 1976년에 파벌 해소를 제창하며 솔선하여 팔일회를 해산했다.[178]
그러나 다나카와 오히라의 자민당 지배 현상이 두드러지자, 후쿠다 퇴진 이후 파벌 재결성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1979년 1월 24일 세이와회(清和会일본어) 창설로 이어졌다.[178] 명칭은 과거 중국 동진 원제가 제갈회의 통치를 정청인화(政清人和; 정치는 맑고 깨끗하게 하고 국민들은 서로 화합해야 한다)라 칭찬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1986년 7월 6일 치러진 양원 동시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한 후, 후쿠다 다케오는 아베 신타로에게 회장직을 넘겨줬다.[178]
아베 신타로가 리크루트 사건의 여파와 췌장암으로 1991년 5월 사망하면서, 산로쿠 전쟁이라 불리는 회장직 승계 정쟁이 벌어졌다. 미쓰즈카 히로시가 모리 요시로의 지지를 받아 정쟁에서 승리하고, 1991년 6월 20일 정식으로 회장에 취임했다.[178]
1993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자민당은 야당으로 밀려났다. 1994년 11월 24일, 자민당은 파벌 해소를 결의했고, 세이와회도 해산했다. 그리고 세이와회 대신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1998년 12월, 미쓰즈카 히로시는 모리 요시로를 후계 회장으로 지명했고, 파벌 이름을 '''세이와 정책연구회'''로 고쳤다.
2000년 4월 5일, 모리가 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후쿠다 다케오 이래 처음으로 총재 파벌이 되었다. 2001년 4월 26일,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대신이 되면서, 2005년 총선을 계기로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당내 제1파벌이 되었고, 이후 자민당은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지배기가 시작됐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나고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승리했다.
2014년 12월,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에서 이탈했고, 호소다 히로유키가 후임 회장이 되었다.
2021년 11월 11일, 아베 신조가 파벌 회장이 되면서 30년 만에 아베파가 부활했다. 하지만,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당분간 회장직을 공석으로 하고, 시오노야 류와 시모무라 하쿠분 회장 대리 외에 마쓰노 히로카즈, 니시무라 야스토시, 하기우다 고이치, 다카기 쓰요시, 세코 히로시게 등 7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219]
2023년 12월, 자민당의 정치 자금 파티를 둘러싼 비자금 조성 문제가 불거졌다.[259]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1억 엔(이후 5억 엔으로 수정[261])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다.[260]
:
2024년 1월 19일,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파벌 해산을 결정했다.[290][291][292]
2. 1. 기원과 후쿠다파 (1962년 ~ 1986년)

1962년, 이케다 하야토(굉지회)의 소득배증계획에 반대하는 후쿠다 다케오를 중심으로 십일회(기시 노부스케 파벌)에서 분열하여 결성된 당풍쇄신연맹(결성 당시에는 당풍쇄신간담회)이 기원이다.[20][21] 같은 해 10월 30일, 기시 노부스케에 의해 십일회의 해산이 선언되었다.[22]
1964년 11월 9일 이케다 내각이 종료되고, 같은 날 사토 에이사쿠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 후쿠다 밑에는 24명의 국회의원만이 남았다. 그들은 기시 파벌 사무소가 있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구관을 활동 거점으로 삼아, '사실상의 후쿠다 파벌'로서 활동하게 되었다.[23]
1965년 6월 3일, 제1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이 발족하면서, 사토 에이사쿠는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으로 발탁하고, 당 간사장에는 자신의 파벌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기용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 8일 전인 1966년 11월 23일, 사토는 기자회견에서 “오른팔”인 다나카에게 아무런 통보 없이 당 간사장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4] 12월 1일에 실시된 당 총재 선거에서 사토는 당선되었다. 12월 3일,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내각이 발족하면서, 후쿠다는 당 간사장으로 기용되었다. 이케다 본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다나카를 배제하고, 후쿠다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사토파”로 파벌을 재편하려는 의도였다고 여겨진다.[24] 이후 후쿠다는 사토의 후계자로 여겨지게 되었다.[23]
후쿠다는 수가 아니라 자질이 수상이 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파벌 확장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1970년 11월, 3기째에 접어든 사토는 최종적으로 수상이 되려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의 수의 논리가 중요한데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후쿠다에게 자파가 없다는 것을 걱정했다. 후쿠다는 파벌 “'''기오이회(紀尾井会)'''”를 결성하여 조직·유세, 정책, 정보·선전의 3개 부회를 설치하고, 마침내 공식적인 첫 후쿠다파를 결성했다.[23]
1972년까지 7년간 이어진 사토 내각의 후계를 둘러싼 소위 “포스트 사토” 다툼에서, 사토가 마음속으로 후계자로 생각했던 사람은 후쿠다였지만,[23] 정권 말기에 다나카의 추격을 받아 결국 총재 선거에서 패배했다(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총재 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주산 클럽(호리 그룹)과 춘추회(소노다파)를 통합하여 “'''팔일회(八日会)'''”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좌절을 계기로, 영수 후쿠다 밑에서, 칠일회(후의 목요 클럽, 다나카파)와 “각복전쟁”이라고 불리는 격렬한 파벌 항쟁을 벌였지만, 후쿠다 자신이 “파벌 해소”론자였고, 파벌 활동에 반드시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성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1976년 12월 5일에 실시된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를 밑돌았고, 책임을 물은 미키 다케오 수상은 12월 17일에 사퇴를 표명했다. “미키 다음에는 먼저 후쿠다가 총리, 2년 후에 오히라에게 넘긴다”는 밀약(소위 대복밀약)[25]을 맺었던 후쿠다는 12월 23일에 실시된 당 총재 선거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어, 이듬날 24일에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후쿠다 다케오 내각 발족에 맞춰 파벌 해소를 제창하고, 솔선수범하여 팔일회를 해산했다.[26]
1978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오히라 마사요시·다나카 연합에 패배했다. 12월 7일, 후쿠다는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했다. 후쿠다의 사퇴에 따라 재결성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79년 1월 24일, 후쿠다를 중심으로 “'''세이와회(清和会)'''”가 결성되었다.[26] 출전은 동진의 원제가 조(詔)에서 저갈규의 통치를 “정청인화(清廉な政治でおのずから人民を穏やかにした)”라고 칭찬한 고사에서 유래한다(『진서』 저갈규전). 이 세이와회는 약칭이 아니라 정식 명칭이다. 1984년 자유혁신동우회(이시하라 신타로파·구 나카가와 이치로파)를 흡수했다.
2. 2. 아베 신타로파 (1986년 ~ 1991년)

1986년 7월 6일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가 동시에 치러진 중참동시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했다. 7월 14일, 후쿠다 다케오는 아베 신타로를 후계 회장으로 지명했고, 아베는 당일 회장에 취임했다.[178]
당시 파벌 내 실력자였던 미쓰즈카 히로시, 가토 무쓰키,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는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렸으며, 경세회의 다케시타파 7봉행과 비견되었다. 아베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후임을 노렸으나, 1987년 10월 나카소네 재정으로 경세회의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재가 되었다. 아베는 다케시타 내각에서 간사장을 맡아 청화회를 주류파로 이끌었고, 다케시타의 후임 총리대신으로 거론되었지만, 1988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이듬해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89년 5월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당시에는 총담관 결석 치료로 알려짐)[179] 7월까지 입원했다.[180] 1991년 5월, 병세 악화로 사망했다.
2. 3. 미쓰즈카파 ~ 모리파 (1991년 ~ 2006년)
미쓰즈카 히로시는 모리 요시로의 지지를 받아 1991년 6월 20일 회장에 취임했다.[178]같은 해 10월 27일, 총재 선거에 미쓰즈카 히로시가 출마하자, 가토 무쓰키는 다케시타 노보루파의 지지를 받던 미야자와 기이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에 분노한 미쓰즈카는 가토를 파벌에서 제명했고, 가토는 정진회라는 별도의 파벌을 조직했다가 1993년 자민당을 탈당했다. 한편, 가토를 지지하던 가메이 시즈카·히라누마 다케오·나카가와 쇼이치·오미 고지·마치무라 노부타카 등 가메이계 의원들은 가토가 청화회를 이탈한 뒤에도 청화회에 남았고, 미쓰즈카를 지지하던 모리·고이즈미 준이치로·다마자와 도쿠이치로·나카가와 히데나오 등 모리계 의원들과 대립했다.
1993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했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주도한 연립 정권에 의해 야당으로 밀려났다. 이는 파벌 간·파벌 내의 극단적 대립이 불러온 참사로 규정되어, 1994년 11월 24일 자민당은 파벌 해소를 결의했고 청화회도 해산했다. 그리고 청화회 대신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21世紀を考える会・新政策研究会일본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그룹 회장은 미쓰즈카가 유임됐다.
1998년 총재 선거 때 모리계가 주도하여 미쓰즈카파를 대표해 고이즈미가 출마하기로 결정됐다. 가메이계가 이에 반발했지만, 모리계는 이를 억눌렀다. 결과적으로 오부치 게이조가 승리했으나, 모리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발탁됐고, 9월에 가메이계는 미쓰즈카파를 이탈했다.
1998년 12월 11일, 미쓰즈카는 후계 회장으로 모리를 지명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는 '''세이와 정책연구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모리가 새 회장에 취임했다.
2000년 4월 5일, 모리가 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 청화회는 후쿠다 다케오 이래 처음으로 총재 파벌이 되었다. 모리가 일시적으로 파벌을 이탈했기 때문에 4월 6일,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회장에 취임했다. 파벌을 계승한 모리는 고이즈미와 연대하여 파벌 내 발언력을 유지하며 파벌을 계속 장악했고, 파벌 통칭도 여전히 모리파였다. 다만, 모리가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건 노나카 히로무·무라카미 마사쿠니·아오키 미키오 등 오부치 내각의 실력자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고, 이들은 모리 내각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1년 4월 26일, 갖은 실언으로 모리가 총리대신직에서 사임하고 고이즈미가 새롭게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대신 모리가 파벌 회장직에 복귀했다. 고이즈미는 당내 최대 파벌로 미키 다케오 이래 자유민주당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던 헤이세이 연구회를 '저항 세력'으로 낙인찍어 집행부에서 배제하고, 아오키의 협력을 통해 헤이세이 연구회를 견제했다. 그 결과, 2005년 총선을 계기로 청화회는 당내 제1파벌이 되었고, 이후 자민당은 청화회의 지배기가 시작됐다.
2006년 고이즈미가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나고 총재 선거가 시행됐다. 청화회에서는 아베 신조와 후쿠다 야스오가 후보로 거론됐는데, 두 사람은 과거 청화회를 이끌었던 아베 신타로와 후쿠다 다케오의 아들이었기에 이는 자칫하면 파벌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결국 내부 조정을 통해 후쿠다가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파벌은 분열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9월 20일 진행된 총재 선거에서 아베가 승리하여 총재가 되었다.
2. 4. 마치무라파 ~ 호소다파 (2006년 ~ 2021년)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승리한 후, 모리 요시로는 회장직을 내려놓고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후임 회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파벌 통칭도 마치무라파가 되었다. 모리는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파벌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했다.[171]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후, 아베는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야스오가 당선되었다. 이로써 청화회는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후쿠다까지 네 번 연속으로 총재를 배출했다. 마치무라가 후쿠다 야스오 내각에서 관방장관으로 입각하자, 파벌은 마치무라, 나카가와 히데나오, 다니가와 슈젠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되었다.
총재 선거에서는 아소 다로를 지지하고 독자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으나, 나카가와가 이에 반발하여 고이케 유리코를 옹립하면서 파벌이 분열되기도 했다. 결국 아소가 총재가 되었고, 청화회에서는 호소다 히로유키가 간사장에 발탁되었다.
총선에서 자민당이 패배하면서 청화회는 굉지회에 이어 당내 제2파벌로 내려앉았지만, 참의원 의원 수를 합쳐 당내 제1파벌의 지위를 유지했다.[181]
총재 선거에서는 마치무라와 아베가 모두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파벌이 분열된 상태로 선거가 치러졌다. 결국 아베가 이시바 시게루를 꺾고 총재가 되었다. 이후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하고 아베는 두 번째 총리대신 임기를 시작했다.
총선 후, 마치무라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에서 이탈했고, 호소다 히로유키가 후임 회장이 되어 파벌 통칭이 호소다파로 변경되었다.
총재 선거에서는 스가 요시히데를 지지했고, 스가가 총리대신이 된 후 청화회에서는 마쓰노 히로카즈가 관방장관이 되는 등 4명이 입각했다.
총재 선거에서는 청화회 차원에서 다카이치 사나에와 기시다 후미오 두 명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207][208][209] 이후 기시다가 결선 투표에서 승리했고, 제1차 기시다 내각에서 청화회 소속 4명이 입각했다.
2. 5. 아베 신조파 (2021년 ~ 2022년)
아베 신조가 2021년 11월 11일 회장에 취임하면서, 30년 만에 '아베파'가 부활했다.[69] 2022년 7월 8일, 아베는 참의원 선거 유세 지원 중 피살되었다.[76]아베 사망 이후, 7월 13일 회합에서 당분간 회장직을 공석으로 하고, 시오노야 류와 시모무라 하쿠분 회장 대리 외에 마쓰노 히로카즈, 니시무라 야스토시, 하기우다 고이치, 다카기 쓰요시, 세코 히로시게 등 7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78] 7월 21일, 당 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파벌 명칭을 유지하고 후임 회장을 공석으로 하는 것이 정식 의결되었다.[80][81]
8월 1일, 모리 요시로는 월간지 『세이론』과의 인터뷰에서 후계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마쓰노 등 5명을 "아베파 5인중"이라 칭하며 이들 중심으로 파벌이 운영될 것임을 시사했다.[82][83][84][85]
8월 10일, 제2차 기시다 내각 1차 개조에서 하기우다 고이치는 자민당 정조회장으로, 니시무라 야스토시는 경제산업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니시무라는 경제산업대신 취임과 함께 파벌 사무총장에서 물러났고, 8월 25일 다카기 쓰요시가 후임 사무총장이 되었다.[90]
9월 29일 간부 회의에서 시모무라 하쿠분은 시오노야 류를 회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으나, 세코 히로시게를 지지하는 참의원 의원들과 세코 본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4] 10월 13일, 모리 요시로의 개입으로 후임 회장 선출은 연기되었다.[84][91][92]
2. 6. 아베 신조 사후 (2022년 ~ 2024년)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회장이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유세 지원 중 나라현 나라시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218] 이후 파벌 명칭은 아베파로 유지하기로 했으며,[219] 후임 회장은 당분간 공석으로 하고 시오노야 류와 시모무라 하쿠분이 회장 대리를 맡고, 마쓰노 히로카즈, 니시무라 야스토시, 하기우다 고이치, 다카기 쓰요시, 세코 히로시게를 포함한 총 7명이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219] 7월 21일, 아베 피살 이후 처음으로 당 본부에서 총회가 열려 이러한 내용이 정식으로 의결되었다.[220]2022년 8월, 모리 요시로는 마쓰노 히로카즈, 니시무라 야스토시, 하기우다 고이치, 다카기 쓰요시, 세코 히로시게를 이른바 아베파 5인중으로 지칭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파벌이 운영될 것임을 시사했다.[223][224] 이후 기시다 후미오 내각의 개각에서 하기우다는 당 정조회장에, 니시무라는 경제산업상에 임명되었다.[229]
2023년, 시오노야는 회장직을 맡고자 했으나, 세코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23] 결국 시오노야를 좌장으로 하고, 5인중을 포함한 15명에 의한 집단 지도 체제가 결정되었다.[248][249][250]
2023년 12월, 자민당의 정치 자금 파티를 둘러싼 비자금 조성 문제가 불거졌다.[259] 세이와 정책연구회(청화회)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1억 엔(이후 5억 엔으로 수정[261])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다.[260] 니혼 대학 명예교수 이와이 도모아키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청와회가 정치자금수지보고서에 가공의 판매자 수를 기입했다고 주장했다.[271][272]
나카가와 히데나오
2023년 12월, 시오노야와 5인중을 포함한 주요 간부들이 비자금을 받았으며, 이를 정치자금수지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73]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청와회 출신 각료들을 교체하겠다고 밝혔으나,[274][275] 청와회의 반발로 일부 정무관은 유임되었다.[275]
2024년 1월, 이케다 요시타카 의원이 정치자금규정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고,[281] 자민당에서 제명되었다.[282]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임시 총회를 열어 파벌 해산을 결정했다.[290][291][292]
3. 역대 회장
다니가와 슈젠※12007년 10월~2009년 2월 8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2009년 2월~2014년 12월 24일 9대 호소다 히로유키 호소다파 2014년 12월 25일~2021년 11월 10일 10대 아베 신조 아베파 2021년 11월 11일~2022년 7월 8일 - 공석※2 2022년 7월 8일~2023년 8월 31일 - 시오노야 류※3 2023년 8월 31일~